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 우리의 오래된 착각과 달리 이성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주지 않지만, 함께, 나름의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포기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인간 종 스스로가 더 저열한 생명체가 되는 것을 기어코 막아낼 수 있다. 이성이 세상을 망쳤다면, 그 이성의 쓰임을 바로잡아야 한다.
🔖 생태조사단은 사람들에게 수라를 보여줘야 한다고, 경험하게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보지 않으면 쉽게 끝을 말하지만, 몸을 움직여 그곳에 가본 사람은 끝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니까. 그야말로 습지의 생명력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런 생명력은 지구와 달, 물과 흙의 힘이 서로에게 작동한 오랜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렇게 쌓인 흙 속에서 수많은 생명이 나고, 자라고, 죽고, 썩어서,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 힘이 거대한 잠재성으로 여전히 습지 속에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정확하게 쑬루세라는 말이 함의하는 바일 것이다. 쑬루세는 그저 순진한 희망 회로가 아니라 함께 탄생하고, 함께 생산하고, 함께 썩어지고, 함께 순환하는, 그런 의미에서 공(共)-생산적이고 공(共)-지하적인 존재론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명명이다.
해러웨이는 "지구의 생물 다양성의 힘을 회복하는 것은 이 쑬루세의 공-산적인 일이고 놀이" 라고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인류세나 자본세 달리, 세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아직은 하늘이 무너지지 않은 불안정한 시대에, 이 쑬루세는 여전히 위태로운 시대 안에서 진행 중인 복수 종의 함께 되기 이야기와 실천들로 구성된다. 우리는 서로에게 중요하다. 인류세와 자본세 담론의 지배적인 각본들과 달리 인간은 쑬루세에서 단지 반응할 수 있을 뿐인 다른 모든 존재와 구별되는 유일하게 중요한 행위자가 아니다. 질서는 다시 만들어진다. 인간은 지구와 함께 있고 지구의 존재이며, 이 지구의 생물적이고 비생물적인 힘들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이다. (해러웨이 2021, 99)
🔖 그는 생태 시대에 '우리'라는 대명사는 인식론적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난제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라는 말은 얼마나 많은 존재를 취합하는가? 그들은 모두 인간인가? 나는 차이의 정치, 그리고 그것을 곡해하는 정체성 정치를 철저히 염두에 두면서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내가 우리라는 말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지구온난화에 책임이 있는 존재가 해마가 아니라는 점을 부각하려는 것이다. 책임을 져야 할 것은 인간이다. 나 같은 존재다. 우리가 우리라고 말하는 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이 찾아낼 것이다." (티머시 모튼, 「생태적 삶」, 김태한 옮김, 앨피, 2023, 15쪽)
🔖 '공주'는 자라서 '여왕'이 된다. 이 두 단어는 이미 성별화된 명칭으로 여성이 '보편 인간'이 되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분투를 내포한다. 디즈니 페미니즘이 '퀸의 형상'에 기대고 그것이 큰 반향을 얻는 건 '여성 서사'가 계속해서 '주류 서사'로부터 배제되어온 역사 때문이다. 하지만 모험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왕의 딸'이어야만 한다는 신(新)신분제적 상상력, 자신의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서 전쟁을 치르고, 역사를 바로잡고, 어떻게든 왕좌에 올라야만 한다는 강박, 그러고 나서도 여전히 '퀸-여왕'이라는 이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현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인간-남성-문명'과 '정령-여성-자연'의 이분법 안에서 펼쳐진다는 재현상의 한계. 우리가 대결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이토록 진부한 관습 아닐까? 자연 착취적이고 여성 배제적이었던 근대적 세계관을 뒤집지 않고서는 해방의 상상력은 피어나지 않으니 말이다.
🔖 테일러는 이런 자립성과 자율성에 대한 자유주의적 환상을 비판하면서 인간은 타인에게 의존하면서 태어났고, 우리 대부분이 타인에게 의존하면서 삶을 끝낼 것이라고 강조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비장애인과 장애인 모두 똑같이 의존적이라는 점이 아니라, 자립과 의존의 이분법이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자립과 자율이 중요한 가치로 논해지는 사회에서 돌봄은 그래도 주목을 받아왔지만 돌봄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의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잘 논의되지 않았다.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듯 의존은 언제나 문제적인 것, 부족한 것, 부정적인 것,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 탓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에서 돌보는 자와 의존하는 자가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돌봄과 의존은 분리 불가능하게 얽혀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상호 의존이 일어난다.
🔖 그러니까 이 세상이 원치 않는 건 휴머니즘에 사로잡혀 무엇이든 착취하려 드는 태도다. 이처럼 위태롭게도 '세계의 끝'에 다다르고 있는 건 자본주의에 기댄 북반구적 삶의 양식일 뿐이고, 위기는 거기에서 멈추도록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힘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인간 자신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아름다운 인간들은 <스위트 투스> 같은 허구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화면 밖에도 존재한다. 예컨대 새만금의 마지막 갯벌 수라를 지키기 위해 20년이 넘는 시간을 버티고 있는 이들을 우리 인간의 서사에서 지워버린다면, 그건 부당할 뿐만 아니라 정확하지도 않은 서술이 될 것이다. 파국이라는 감각을 지닌 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냉소하던 내가 크레이크적 태도에서 에이미적 태도로 서서히 옮겨 가고 있는 건 바로 그런 사람들 덕분이다.